의순공주 이야기

당대 조선인들의 심리 상태와 가중관념을 잘 보여주는 기록 중 하나로서, 재미있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써 보네요.

의순 공주..라고 하나 사실 왕의 딸은 아니었는데요.
청나라 섭정 예친왕(도르곤)이 왕의 딸을 후궁으로 보내라고 하니, 효종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딸이나 가까운 친척 조카딸을 보내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였고, 왕의 친딸과 조카딸 대신 보낸 게 의순공주에요.


의순공주는 성종의 서자 익양군의 후손인 이개윤의 딸인데요.
이름은 이애숙(李愛淑)이며 원랜 왕족이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의 지위였는데, 이개윤과 그의 딸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하니 발탁하고 양녀(공주)의 지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공주로서의 이름을 지어줄 때, '나라에 의로운 일을 한다'하여 의순공주(義順公主)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하네요.


그렇게 16세에 보내져서 예친왕(도르곤)과 결혼을 하였으나 도르곤이 7개월만에 사냥도중 말에서 낙마하여 사망하였고.
그 이후에는 정적들이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그의 파벌이 정치적으로 탄압받게 되어 반 강제적으로 조카이자 백양왕의 아들인 '보로' 라는 자에게 넘어갔다가 그 사람도 1년만에 죽음을 맞음으로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그렇게 6년간 청나라에서 살다가 이개윤의 간곡한 요청으로 조선으로 귀국하게 되었는데요.
당시 조선의 사대부 양반들과 관료들은 이에 대해 조정의 명령을 어긴 것이다.
이개윤이 청나라에 줄을 대기 위해 딸을 팔고 나중에는 조정의 허가 없이 청나라와 무단으로 접촉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개윤과 의순공주는 사회적으로 많은 비판과 지탄을 받았다고 하네요.

결국 당대 많은 여자들이 화냥녀(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힌 여자)라고 비난받던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의순공주 또한 많은 공격을 받았으며, 특히 다른 화냥녀들과 달리 사회적으로 매우 잘 알려진 인물이었으므로 그러한 비난과 인신공격의 정도는 매우 강하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지원이 끊겼고
사람들의 멸시와 비난 끝에 부모와 친척들의 관직도 삭탈당하고 공주 지위도 박탈되어 결국 스트레스로 인해 28세에 사망하였다고 하네요.

후기의 기록에는 의순공주가 아닌 이개윤의 딸 이애숙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공주 지위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한 번 둘러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몆 가지 있는데요.
먼저 과거나 현대나 마찬가지로 남을 이용만 하고 쓸모없어지면 버린다라는 한국인들의 오랜 악한 관념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있구요.

그 외에도 당시 사람들의 정조에 대한 집착은 놀라울 정도였다는 것을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데요.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 하여도 조선인이 아니면 인정할 수 없고, 남편이 죽었으면 여자도 물애 빠져죽어서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망상이 저 정도로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다는 게 놀랄 노짜더군요.

정작 남에게는 그렇게 요구하면서 자기는 그렇게 안 하는 자가 태반이었고.
더 나아가 남성 사대부들은 첩을 여럿 들였던데다, 부인이 죽었다고 강물에 떨어져 같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지요:)

이런 망상으로 인해 생겨난 게 소위 의정부시 금오동 자락에 있는 '족두리 묘' 인데요.
당시 사람들의 이개윤과 환양녀에 대한 왜곡된 가중관념과 망상에서 기인한 반발심이, 의순공주가 청나라에 가기 싫어 강에 투신하고 족두리만을 남겼을 것이라고 생각해 망상속에 만든 가짜 묘지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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