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과 죽음을 바라보는 2가지 관점과 상호논증

아래 글은 스티븐 케이브의 '불멸에 관하여'를 읽고 생각이 적어보는 독후감인데요. 위 책은 각각의 논리 자체에 대해서는 논증을 잘 했으면서도 근본적으로 편향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기에 이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보네요.

먼저 '불멸에 대한 추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인간은 불멸에 대한 추구 혹은 미추구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위 책의 분류를 인용하여 각각의 의견들에 대해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은데요.....


1. 불멸을 추구하는 관점


  • 생물학적 불로불사 - 진시황, 현대의 특이점주의자, 정신 업로드
  • 부활 이론(새 몸) - 초기 기독교, 이슬람교 등
  • 불멸의 명예를 추구하기 - 알렉산드로스, 현대의 유명 인사들, 명예
  • 영혼 이론 - 죽어서도 영혼은 살아남는다, 소크라테스, 현대 종교인들 등 보편적인 관념 중 하나
  • 환생설 - 불교, 힌두교




2. 불멸을 추구하지 않는 관점

  • 인간은 불사가 아니며 육체가 곧 정신이라는 관점,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관점
  • 불멸은 극도로 고통스럽고 지루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먼저 불멸을 추구하는 논리와 이론들의 논리적 결함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데요.

생물학적 불로불사 - 현재까지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으며, 인체의 복잡성과 물리적 한계로 인해 문명이 발전할수록 요구 리스트만 급증하고 있다. 많은 질병들이 정복된 현대에서는 대부분 인간 육체의 한계수명대로 살고 있으며 암을 정복하더라도 인간의 기대수명은 7년 이하 정도 증가할 뿐이다.

거의 모든 과거 시대에 문명이 한단계 더 발전하면 불로불사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이뤄진 적이 없고, 이러한 경향은 현대의 특이점주의자들과 신경 업로드 이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육체의 근본적인 물리적 한계로 인해 일정 수준 이상 삶을 늘리기 어렵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늘어난 삶의 대부분을 노쇠한 상태에서 질병에 시달리면서 보내게 된다는 사실이다.  현대 문명은 수명 증가 요구의 상당수를 이루어 주었지만, 대부분 노쇠한 채로 보내게 되었고 현대사회의 큰 문제가 되었다.


부활 이론(새 몸) - 그런 식으로 수천수만년 이상 지나서 부활?하였을 경우 나와의 동일성이 유지되어 부활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보장을 할 수도 없으며 현재까지 그런 일이 일어났던 적도 없다.


불멸의 명예를 추구하기 - 명예와 업적만이 남는 것이지 나의 존재(의식)의 영속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여기서 더더욱 심한 문제는 명예와 유명세에도 지속한계가 있다는 것이고, 수십년이나 수백년 흐르면 잊혀져 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영혼 이론, 환생설 - 영혼이 있다는 이야기들은 많이 있지만 엄격한 검증실험 하에서 증명된 경우는 없다. 영혼이 있다면 뇌 손상이 일어나더라도 의식은 유지되어야 하나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 보여지고 있다. 뇌 손상이 일어날 경우 해당 영역이 관장하는 정신 기능또한 상실된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관찰 결과이며 상당히 많은 과학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환생에 대해서도 역시 객관적인 검증이 이뤄진 사례는 없다.


만약 불멸의 삶이 주어지게 된다면? - 결국 모든 것을 다 경험하게 될 것이고 삶이 지겹거나 질리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의 많은 이야기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고, 결국 불멸이란 영원한 권태일 지 모른다.



위 책의 저자는 불멸 추구를 비판하고
불멸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현재 삶에 집중해야한다는 논리를 결론으로서 내세웠는데요. 문제는 불멸을 거부하고 현재의 인생에 감사해야한다는 것 또한 불멸 논리와 비슷한 논리적 결함구조라는 특성이 있다는 점이 있더군요.


불멸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논리의 문제점을 들자면...
먼저 죽음 이후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는 점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발전에 대해 현재 시점에서 완벽히 예측할 수 없음에도 기존의 데이터만을 바탕으로 생물학적 불멸이 불가능하다고 미리 결론내렸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멸하지 않으므로 인생에 감사해야한다'는 논리에 대한 비판인데요.
사실 위의 문장은, '내세가 있으므로 좋은 내세를 받기 위해 현 생애에 대해 매사 감사하며 살아야한다는 논리'와 근본적으로는 같은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과 '인생에 대한 감사'는 논리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주제이며, 도리어 인생이 짧고 추상적인 의미가 없다면 인간의 인생 또한 별 가치가 없는 무의미함에 가깝다는 논리적 인식도 가능하지요.

'인생에 감사해야 한다'라는 격언은 사실관계를 엄밀히 따져보면 근거 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고, 인생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도 결국 인간의 불멸성 추구와 마찬가지인 인지적 환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생과 삶에 대해 불멸성이나 신 등을 가정하지 않으면 절대적인 논리적 근거를 가정할 수 없고, 기반 논리 없이 무작정 감사해야한다는 주장은 억지주장과 망상 사이의 어딘가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근거 없는 소리일 뿐이며, 동서고금의 성직자들이 주장하던 '삶을 주신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따위의 논리를 단어만 조금 바꾼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논리적 에러는 리처드 도킨스 등 무신론자들이 도덕성에 대해 주장할 때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한데요. 이들 또한 도덕성이나 삶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나, 문제는 그 도덕성이나 삶이 무엇을 위한 것이라거나 그러한 주장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는 근거에 대해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결국은 과거 성직자나 유신론 사상가들이 흔히 하던 주장에서 말만 조금 바꿔서 앵무새처럼 주장하게 될 뿐이고, 궁극적으로 다른 사상이나 도덕에 대해 근거있게 제시하지 못합니다.


위 주장의 또 다른 문제점은, 결국 인간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잠재워 줄 수가 없다는 점이 있는데요. 결국 무얼 해도 소멸할 뿐이라면 도덕이나 삶에 대한 가치 또한 크게 있을 리 없고, 결국에는 소멸할 것이기에 이에 대한 두려움도 항상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 근거없는 감사 사탕발림과 같은 것으로 잊으려고 해 봐야 근본적으로는 고통을 잊으려고 마약을 피우는 것과 크게 다를 리 없으며, 결과적으로는 도리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재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때 죽음 이후나 불사여부에 대해서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고 논증할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이지만 공통적으로 논증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요. 그건 바로 인간은 죽음을 체험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불멸의 존재이자 영적 존재라면 형태면 바뀌어 계속해서 순환하거나 내세로 갈 것이므로 죽음이란 그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에 지나지 않고, 육체적 죽음이 완전한 소멸이라면 인간은 죽음에 대해' 체험할 수 없을'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완전 소멸이라면 어차피 죽는 순간 모든 인식과 지성이 소멸할 것이므로, 죽음에 대해 체험한다거나 죽은 뒤에 대해 알 수 없으며 죽은 뒤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무의미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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