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출생주의는 어떻게 현대사회에 자리잡게 되었을까요

아래 글은 PGR 사이트에서 퍼온 글인데요. 아래 글을 보고 생각나는 게 있어서 올려보네요.

제목 :  "나는 낳음당했다", 반출생주의, 탈권위주의, 그리고 저출산 
원문 링크 : https://pgr21.com/freedom/90378

 “나는 낳음당했다.”

2010년대 한때 디시인사이드에서 유행한 말입니다. 나 자신은 나 자신의 뜻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부모의 뜻에 따라서 태어남을 당했다는 것으로, 이에는 자신은 원하지 않는 출생을 당했다고 자조하고, 부모를 원망하는 속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신문 기사에서도 ‘N포세대’를 묘사하기 위해 인용하기도 했으니, 가히 한 세대를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중부일보 기사, 연합뉴스 기사)


이는 단순히 한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이를 철학적으로 논하는 것이 반출생주의입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을 낳지 않는 것이 도덕적입니다. 정도는 다를지라도 이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저출산이 심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닐까요? 삶이 힘들어지면 자식을 적게 낳거나, 심지어 낳은 자식을 죽여서 인구를 조절하는 일 그 자체는 인류 역사에서 여러 번 있었던 일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사회의 병으로 여겨지거나 비도덕한 일로 여겨져 어떤 초월적인 설명을 끌어와서 정당화해야 하는 이례적인 것으로 취급되었지(예를 들면, 일본 에도 시대의 영아살해 풍습에서는 아이를 신에게 돌려보내는 것이지 죽이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 도덕적이며 낳는 것이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면 현대 사회의 저출산에서는 아이에게 고통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낳지 않는 것이 도덕적이며, 낳는 사람을 향해 자식에게 고통을 가하는 악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인도에서는 2019년에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 자신을 동의 없이 낳았다고 고소한 사례가 있는데 (bbc 한국 기사), 이것조차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셰나 시프린, 제럴드 해리슨, 줄리아 태너, 아실 싱 등이 자식은 부모에게서 동의를 받지 않고 태어난다는 문제를 들어서 반출생주의를 주장했습니다.(영어 위키백과 Antinatalism(반출생주의) 문서)


반출생주의 철학의 논리 자체는 뭔가 새로운 발상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람들도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 직관을 가지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2019년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라는 책이 한국에 번역 출판되어 알려진 철학자 데이비드 베너타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1. 쾌락이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2. 고통이 있는 것은 나쁜 것이다.

3. 쾌락이 없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4. 고통이 없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이 네 가지를 전제로, 자식을 낳는 것은 좋거나 나쁜 것이지만,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은 좋거나 나쁘지 않은 것이므로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설파합니다.(영어 위키백과 Antinatalism(반출생주의) 문서)


그러나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는 반출생주의는 왜 현대에 와서야 주목받을까요? 여기서부터는 제 생각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합리주의와 합리주의에 밑바탕을 둔 탈권위주의가 위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종 권위들은 쉽게 극복될 수 있었으나 부모의 권위는 쉽게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순자가 부자관계는 이익 때문에 유지된다고 했고, 기원후 2-3세기에 공융은 자식은 부모의 욕정의 산물이라고도 해 ‘부모의 끝없는 사랑’을 부정하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렸을 적 자식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부모의 양육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설령 그것이 부모의 이익 때문에, 부모의 정욕 때문에 양육된다 할지라도 결국 자식은 부모가 자식에게 투자한 자원만큼 보답하는 것이 윤리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시혜를 받고 있는 자식으로서는 부모의 권위 아래에 놓이는 것을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것이 현대에 들어와서 공교육이 자리를 잡으니, 자식은 단지 부모만의 시혜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도움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자식의 양육에서 부모의 역할이 약해지고, 공교육에서 자식을 독립적인 시민으로 자라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잡으면서, 원래는 한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부모에게서 독립적인 성인으로 인정받던 자식들은 부모의 양육 아래에 있을 때에도 점차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받아야 마땅하다는 윤리적 명제가 자리를 잡습니다.


이렇게 부모 슬하의 자식을 독립적인 개체로 대우하는 윤리는 자식이 부모의 양육을 받으므로 부모의 권위 아래에 놓여야 한다는 윤리와 충돌하게 됩니다. 그러나 탈권위주의는 이미 시대의 대세가 되었으므로, 시대는 마땅히 부모의 권위를 해체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나갑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양육에서 유래하는 부모의 권위를 어떻게 해체해야 하냐는 문제가 나타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반출생주의적 사고방식이 퍼져나갑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자식은 부모에게서 동의 없이 태어난다는 점을 파고들어, 부모의 양육은 시혜가 될 수 없다는 관점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자체는 반출생주의가 아닐 수 있지만, 이를 주장하는 이상 반출생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동의를 받지 않고 태어난다면, 부모는 자식을 강제로 태어나게 했으므로 그 일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윤리적이며, 자식은 그런 부모에게 윤리적인 책임을 질 이유가 없습니다. 이는 마치 납치범이 사람을 납치한 이후 아무리 잘 먹여주고 잘 재워주더라도 피해자가 납치범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탈권위주의는 또 다른 방향으로 부모의 권위를 해체합니다. 부모의 권위를 주장하는 유교에서도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라고 하여 부모의 책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연장해서, 마땅히 부모다운 부모만이 권위를 지닐 수 있다는 윤리적 주장을 강화하여 현실 세계의 부모들은 부모답지 못하므로 권위를 지닐 수 없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자체는 현실 세계에 좋은 영향을 줬습니다. 가정폭력과 잘못된 양육으로 인해 제대로 된 인격체로 자라나지 못하는 수많은 자식들을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부모의 권위를 해체한다는 목적을 위해 일반적으로 부모의 잘못인가? 싶은 문제들까지도 문제적인 것으로 지적되었고, 부모다운 부모의 허들은 나날이 높아져갔습니다. 그리고 현 세대에서 부모가 될 옛날의 자식들 역시 자신의 삶의 불행을 부모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부모의 잘못을 캐내는 데 도움을 보탰습니다.


이는 부모의 권위를 해체하고 자식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하는 데에는 보탬이 되었으나, 그와 함께 부모들에게 사회가 강요하는 기준선은 끝없이 올라가게 되었고, 결국 그 끝없이 높은 기준선 앞에 사람들은 부모가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이는 마치 강간을 막기 위해 성적인 친교에 끝없이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한 결과 남자들이 성을 포기하는 현 세태와도 유사한 느낌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현대에 부모의 권위를 해체하기 위한 노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반출생주의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윤리적 가치가 심어졌습니다. 하나는 부모는 자식을 강제로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므로 자식을 책임져야 마땅하다는 것이고, 하나는 부모의 권위를 해체하기 위해 권위를 받아야 마땅할 부모의 기준을 훨씬 위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이제는, 그 기반 위에서 반출생주의의 논의가 꽃피워져 사람들이 출산을 비도덕적으로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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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현대사회에서 반출생주의가 퍼지게 된 이유를 꼽자면...

보통교육과 합리주의, 개인 의식의 발달로 인해 집단주의와 전통적 가치관이 비판받는 경우가 증가했고. 부모-자식간의 관계도 이런 큰 흐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합리주의와 개인주의, 탈권위주의의 발전 
-> 각종 전통적 고정관념과 권위 의식이 해체되기 시작함 
-> 전통 사회에서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던 '부모'의 권위에도 조금씩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


현대 사회의 기본 명제 중 하나가 바로 개인의 자유와 상호동의, 자발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특히 출산의 경우에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기본인 '상호 동의'와는 수억 광년 정도 떨어져 있고, 낳음당한 사람의 '자발적 동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대적인 관념 하에서는 출산 그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된 거죠.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반출생의 정당성이 자체적으로 완결된 논리구조를 가지고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에 어렴풋이라도 인지하는 경우가 많으니... 출산의 비동의성으로 인해 '낳음 당했다'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 자연스레 그 다음 단계는 부모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 혹은 출산의 정당성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식이 부모가 낳아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효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지만, 위의 두 가지 인식인 인생 고통론 + 동의의 부재라는 조합을 더하면 효도라는 개념은 거의 논할 필요조차 없는 비합리적인 악습이 되고. 반대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보살핌이나 여러 행동들은 당위성 높은 의무로 변하게 되는 것이죠.


아직까지는 가정과 효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이 구세대(586)이상에게 많이 남아있어 공개적으로는 이런 사조들이 잘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온라인 공간 정도만 되어도 '효'에 대한 부정과 조롱은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2019년 이후로는 매년마다 효도나 출생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는 걸 볼 수 있더라구요. 19년과 20년이 다르고 20년과 21, 22년이 또 다릅니다.

근래 10대들의 경우에는 이런 흐름사조의 영향으로 부모에게 항의하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하는데요. 사실 애를 안 낳았으면 가난한 부모들도 조금은 덜 고생했을 것이고, 애도 그렇게 가난과 학대로 비참한 인생을 살지 않았을 테니 대부분은 자녀의 항의에 별로 할말이 없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혹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말하는 원숭이와 짐승 사이에 있는 종자들이라면 그냥 자식을 패던가.....


사실 현대사회에서는 생각보다 반출생주의가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반출생주의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은 애를 낳으면 안 된다'라던가, '고딩엄빠'를 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지고 '저 하등한 양아치들' 같은 생각이 든다면 일정부분 반출생주의에 동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근래에는 SNS의 발달 등으로 인해 셀럽들을 자주 접할 수 있고. 육아나 결혼의 부정적인 측면이나,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이 가지는 여러 불만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어 갈수록 출산의 허들이나 부모로서의 책임의식 등이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있구요.


여기서 철학적으로 조금 더 나아가거나, 혹은 가난한 사람이나 장애인이 애를 낳으면 정상적인 사람이 출산한 것보다 무조건 더 큰 고통이 있는 거냐고 이야기할 수 있냐는 비판이 들어오게 되면... 결국에는 보편적 반출생주의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은 고통이고 자식은 자식 본인의 동의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금수저나 왕자, 공주로 태어난다고 해도 여러 고통들을 겪는 것을 보면 결국에는 그냥 누구든지 애를 낳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는 한국에서 현재진행형인 흐름이라고 볼 수 있죠.


실제로 한국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아 0.6이나 그 이하에서 왔다갔다 하는 곳들은 대개 강남3구같은 부유한 대도시 밀집지역인데요. 이들 지역은 한국에서 가장 부유하지만, 애는 더더욱 안 낳는 것을 보면 부의 수준이나 부모로서의 자격 인식과 같은 것들이 실제 출산율과 양의 상관관계를 가지지 않으며, 그럴수록 오히려 반출생주의가 강화되는 면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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