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상가 나혜석에 관하여


과거 일제시대에 나혜석이라고 불리는 여성 예술가가 있었는데요. 
1920년대에 조선에서 여성 예술가로서는 처음으로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그 외에도 초기 현대 미술 작가로서 당시 조선의 사회상과 풍경들에 대하여 현대적인 미술 화풍으로 그려내었습니다. 



위의 그림들은 당시 나혜석이 자신과 주변 풍경에 대해 묘사한 그림으로서, 현대적이고 뛰어난 화풍을 가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당시의 남성 예술가들은 이러한 뛰어난 여성 예술가의 능력에 나름대로 질투?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작품 활동과 사회적 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의 일부를 의열단이나 당대의 사회활동가,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다만 이러한 그림과 조선 사회에 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의 말로는 매우 비참하였는데요. 독립 직후인 1948년 12월 10일에 떠돌이 병자를 위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그녀의 이름조차 오명으로 남아, 여자들이 교육을 받고 싶어하거나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면 '나혜석'처럼 되고싶어(비참하게 되고 싶어?)라고 협박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로는 다름아닌 '정조망상'이나 '어머니로서의 모성애' 라는 전통적인 관념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기 때문인데요.

당시 조선사회의 여자들에게 요구되었던 정조 관념을 비판하고.
이혼고백장에 대담하게 남편이 자신을 성적으로 만족 못 시켜서 이혼했다고 글을 남기는 등, 당시의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금기에 속했던 이슈들을 거리낌 없이 언급하고 비판하였기에 사회에서 큰 지탄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성애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사회가 만들어낸 일종의 억압 기제라고 보았는데요. 이러한 관점은 현대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상당히 급진적인 것으로서, 당대에는 참으로 미스테리한 것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겠지요.


동시대 나혜석 정도의 능력과 지위를 가진 조선의 저명한 남성 인사들과 예술가들은 바람피기와 축첩질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분명 위의 비판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이었지만, 이는 당시의 남성 저명인사들에게는 위협으로 여겨져 도리어 억지스러운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당시 기준으로는 물론이요. 
현대에도 '걸레년'따위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는 비속어들이 널리 사용되는 조선 사회의 통상적인 개념 대비 엄청나게 앞서 있었음이 분명한 사람인데요. 지나치게 뛰어났던 능력과 생각들로 인해 당시의 남성들에게 질투를 사서 망해버릴 케이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씁슬하게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기리면서 글을 씁니다. 
오늘이 나혜석 예술가의 생일이었다고 하네요.


참고자료

위의 글에 있는 그림들은 전부 다 나혜석의 작품으로, 위로부터 각각 나혜석의 자화상, 파리 풍경, 해인사의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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