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효사상에 대한 비판과 논리적 결함에 관한 소론

동서고금 '효'는 상당히 중요한 덕목으로 다루어져 왔으며, 일부 사회에서는 법률과 지배계급의 인치적 명령의 형태로 강제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에 비해 그 논리적 근거는 매우 빈약하며, 효를 빌미로 한 압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도그마의 도입과 철학적 사회적 퇴보를 발생시켰다. 또한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다양한 악습들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영향을 끼치고 있으므로, 비판적 관점에서 효사상 자체에 대해 비판하는 논리를 다루어 본다.


전통적으로 효는 크게 2가지 관점에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나는 자녀에게 생명을 부여한 것에 대한 감사의 논리이고, 또다른 한가지 관점은 키워주고 보살펴준 것에 대한 호혜성 원리로서 보답할 의무(정언명령)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은 효와 이에 기반한 압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문제를 단순화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논리적 결함과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아래의 문단에서는 효의 근거가 되는 2가지 관점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한다.


먼저 생명을 부여한 것에 대한 감사의 논리에 대해 비판해보자면, 개개인의 삶은 자유의사로서 선택한 것이거나 원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보통 감사함의 마음은 원하는 것이 주어졌거나 개인의 의지와 합치되는 무언가에 대해 도움이 주어졌을 때에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무관한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도리어 인간 인생에 있어 발생하는 생로병사나 인생의 수많은 고통에 대해 생각해볼 때, 인생은 도리어 원하지 않았는데 강제된 것에 더 가깝다. 따라서 인생의 존재에 대해 감사함의 요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쉽게 내려지는 결론이며, 감사해야 할 논리적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효 사상을 추종하고 강제하는 일부 보수적 기성세대의 표현을 빌자면 '인생은 원하지 않는 시련의 연속이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인생에 대해 맞는 표현이고 지혜로운 표현이라면 더더욱 '강제된 고통'에 대해 감사해야 할 정당성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갑작스레 와서 더욱 더 강해지고 극복하는 버릇을 들이라는 미명 하에 강제적이고 장기적인 폭력과 괴로움을 행사한다면 여기에 감사해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생 역시 비슷하게 볼 수 있고, 따라서 삶을 부여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논리의 정당성 또한 상실된다고 볼 수 있다.


딱 까놓고 말하자면.. 솔직히 한국에서 부모 되는 인간들 중에 고심하여 애를 낳는 부류는 매우 드물지 않은가? 대부분은 그저 자신의 성적 욕망과 번식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성관계를 맺다가 덜컥 임신하거나, 혹은 주변 사람들의 압박에 못 이겨 낳는 부류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런 자들의 무생각과 무계획 속에 지구의 노동 계급으로 탄생하여 일생을 고통스런 노동과 집착의 충족에 전부 소모해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고통 뿐인데, 무엇에 감사해야 한단 말인가?



효를 지탱하는 2번째 개념인 호혜성 원리는 과거 성리학이 지배 이념이던 시기때부터 주류 이론으로 지지되어오던 것으로, 부모가 돌봐주고 키워줬으니 이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크나큰 논리적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 사회의 상식과는 맞지 않는 잘못된 부분이 있다.


먼저 그러한 호혜성이 성립되려면 다음과 같은 요건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1. 베푸는 자가 자발적이고 이타적으로 베풀어야 한다.

2. 그 호혜성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어야 하며 순수한 희생이어야 한다.



그러나 부모의 돌봄과 키움은 그 근원을 따져보자면 자유의사에 따른 선택이며, 이에 따른 책임을 수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부모의 돌봄은 자발적이고 이타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선택에 따른 의무나 지불해야 하는 대가에 대해 수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는 순수한 희생이라고 볼 수 없으며, 정언명령과 자유의사에 따른 책임 수행의 의무에 따른 행동을 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식의 입장에서 볼 때 감사해야 하는 의무나 상환의 의무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그 정신적 의무나 상환의 집합체인 '효'또한 호혜성의 대상이 아니기에 논리적 근거를 상실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고 본능에 따른 인간의 기계적 작용이라고 주장할 법도 한데, 그렇다고 해도 2가지 관점에서 이에 대해 반박되며 이러한 관점  또한 올바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자녀 출산이 인간의 종족보전 본능에 의해 자동적, 기계적으로 수행되는 행동이라고 한다면, 자녀를 돌보고 양육하는 것도 인간의 기계적 행동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기계가 기능적으로 수행하는 일에 대해서 감사함의 마음을 가지지 않듯, 자녀 출산과 양육도 기계적 활동에 속하므로 이에 대해 감사한다라던가 특별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론 인간의 자녀 출산이 기계적 행위인가에 대한 비판이 있다. 자발적으로 독신이나 무출산을 선택하는 인구도 상당수이며, 출산이 법률에 의해 강제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때 자녀 출산과 양육은 기계론적 행위는 아니며, 자유의사에 따른 행동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전통적으로 효에 대한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2가지 개념은 그 논리적 결함으로 인해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현대 사회에서는 '효'자체도 논리적, 도덕적 정당성을 상당 부분 상실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신이 성서에 효도를 명령했다'와 같은 논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와 같은 논리는 개개인의 신앙에 속하는 것으로 논증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현대 사회의 변화하는 흐름과 논리적 정합성에 맞게 도덕과 사회적 관념 또한 재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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