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제서열사건과 한국인의 본성

오랜만에 한국사 관련 책을 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어 적어보는데요.
등제서열사건이라고.... 한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은 대개 알고 계시는 사건이죠. 빈공과(당나라에서 외국인들 대상으로 치던 공무원시험)에서 발해인이 1등하고 신라인이 2등을 하니 신라인들이 30년 가까이 ㅂㄷㅂㄷ대면서 큰형님(당나라)으로부터의 인정에 대한 집착, 공무원시험 등수 집착을 보였던 사건입니다. 

사실 현대에는 당시 기록이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는 편인데(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에 대한 기록조차 거의 없다고 하죠...) 이런 가운데 이 같잖은 사건이 무려 1100여년이나 기록에 남아 있던 것을 보면 이런게 한국인의 유구한 본성인가 싶더군요.


[쟁장사건, 등제 서열 사건]


이동(李同)은 869년(경문왕 9)에 왕자인 사은겸진봉사(謝恩兼進奉使) 소판(蘇判) 김윤(金胤)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국학(國學)에 입학하여, 875년 당나라 예부시랑 최항(崔沆) 아래에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이 때 함께 응시한 발해의 유학생 오소도(烏昭度)가 수석합격을 하고 이동이 차석을 차지함으로써 신라와 발해의 빈공과 쟁장사건(賓貢科爭長事件)의 발단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라는 906년에 실시된 빈공과에서 최언위(崔彦僞)가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을 누르고 수석으로 합격할 때까지 30여년간 커다란 수치감과 굴욕감을 인내해야 하였다.


쟁장(爭長) 사건은 897년에도 벌어졌다. 당에 간 발해의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을 것을 요청하였다가 거절당한 것이다.

발해 왕족 대봉예(大封裔)는 최치원(崔致遠)이 쓴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는 왕자(王子)라고 되어 있으나,  누구의 아들인지 확실하지 않다. 대봉예는 897년 하정사(賀正使)로 당나라에 들어갔다. 그는 발해가 신라보다 국력이 세고 외교적 위치가 높은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당나라에서 조헌(朝獻) 할 때 발해 사신의 자리 순서는 신라 사신 보다 아래를 두고 있었다. 이에 대봉예는 서장을 올려 발해가 신라 위에 거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 당하고 말았다.

906년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 역시 당나라로 가서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그때 신라의 최언위(崔彦撝)도 함께 시험을 보아 합격하였는데, 이번에는 오광찬의 석차가 최언위의 아래였다.

마침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오소도는 이 사실을 알고 당나라 조정에 오광찬의 석차가 최언위보다 위로 가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나라 조정에서는 학식과 재주가 오소도보다 최언위가 뛰어남을 들어 거부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그뒤 양국의 관계를 더욱 경쟁적으로 만들었다.]


등제서열사건 원문 : https://m.cafe.daum.net/histown/RFV3/15



보면 볼수록 참 한숨이 나오죠. 고작 외국에서 치른 공무원시험 등수에 집착하는 것도 그렇고... 절대다수의 신라인은 빈공과랑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건에 대해 1100년 뒤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한 기록을 남겼을 정도니, 가히 이 사건에 대한 신라인들의 국가적인 집착이 엿보일 정도입니다.

요즘에도 한국인들은 김연아니, 박태환이니, 오징어게임이니, 금메달이니, 삼성이 Xnm 공정을 만들었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거에 집착하고 자기 일처럼 생각하곤 하는데.... 등제서열사건을 보니 이런 부질없는 정신병리적인 특성이 1100여년 전부터 있던 유구한 한국적 특성이었던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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